[스크랩] 여러가지 깨달음을 주는 좋은 글들이오 ♡
이 교수님 글이 참 좋소.
쌍코햏들과 나누고 싶어 이쁘게 정리해보았다오 ㅎ
다들 읽고 많은 생각할 수 있길 바라겠소.. ^^
대박의 꿈
너도 나도 대박의 꿈을 갖고 산다.
그러나 이점 분명히 하자,
대박이란 것, 한결 같이 한 우물을 판 노력의 결과일 뿐 요행은 없다.
결코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
노력 없이, 뿌린 것 없이 노력 이상으로, 뿌린 것 이상으로 대박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도둑놈이다.
도적의 심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전통주 재현에 성공한 배상명회장, 속된 말로 술 하나로 대박을 터뜨린 인물이지만
그러나 40년 세월, 술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다,
남들이 맥주 소주 양주에 눈이 팔렸을 때 전통주의 부흥을 예견하고 그에만 매달렸다.
<백세주>의 대박... 그것은 요행도 아니고 운도 아니다,
40년 세월에 걸친 노력,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정말 대박을 터뜨리고 싶으면 한결같이 한우물을 파라.
그러면 어느날 대박이 터질 것이다.
물론 세상의 흐름을 따라서 인심의 순리를 따라서 사는 것이 대전제다.
세상의 흐름을 거역하고 인심의 순리를 거역하면 대박이 아니라 쪽박일 것이다, 그점 분명히 하자,
요즘 '달인' '생활의 달인'에서도 보면 그 사람들은 다르다, 우선 부지런하다.
그리고 끝없이 연구하고 노력한다.
그래서 남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된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버림 받지 않는다.
이 눈치 저 눈치 본면서 요령피우고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
잔머리 굴리면서 얄팍한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군색하다.
언제나 남들로부터 버림 받을까, 내침을 당할까 전전긍긍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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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하는 자, 그자의 모습이 내 모습이다,
나의 너, 너의 나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체로는 이해 관계가 대립하고 피차의 욕심이 충돌할 때, 경쟁의 우열관계에 있을 때,
자존심에 상처를 주거나 또 자신의 그늘과 상처를 건드릴 때 등이다.
물론 자신과의 관계 이전에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공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실은 가장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이 정작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가령 부자관계에서도 이런 것들은 잘 나타나는데,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공부를 못했고 그것 때문에 성장과정에서 상처를 입었던 사람들의 경우,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못 참는다. 참을 수가 없다.
왜냐 하면 자식을 통해서 다시 아버지 자신의 그늘진 모습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버지라는 사람이 자식을 볼 때,
자식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식의 모습에서 아버지 자신의 혐오스런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성장과정에서 가난에 시달린 사람들의 경우
가난했다는 사실 때문에 모멸감을 느껴야 했고 상처를 받은 사람도 많은데,
이런 경우, 자신이 돈을 벌거나 해서 자수성가를 해도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대단히 경멸적인 태도를 취한다.
자신 속에 살아있는 가난과 궁기(窮氣)의 상처, 그 지긋지긋한 상처를 보기 때문이다.
물론 가난하게 성장해도 잘 극복하고 넘어온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런 그늘이 없다.
또 자신이 말이 많은 사람들은 말이 많은 사람들을 싫어한다.
자신이 말이 많기 때문이다.
자신이 떠들 기회를 가로채이기 때문에 상대를 싫어한다.
말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말 많은 사람이 재미있다.
그리고 싫어한다고 해도 그렇게 적대적으로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잘난 척 하는 사람을 유독 싫어하는 사람은 자신이 잘난 척 하고 싶기 때문에
상대방의 그런 약점들이 눈에 잘 들어온다.
또 촌스럽다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늘 세련되지 못한 구석을 숨기는데 전전긍긍하기 때문이다.
소위 심리학에서 컴플렉스라는 용어를 자주 쓰고,
그것을 상대에 대한 투사로 이해하는 바도 그런 것일 터이다.
싫어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대에서 발견하게 될 때, 상대가 그토록 싫고 혐오스러운 것이다.
요컨대 정말 싫어하는 자, 그 자의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것이다.
내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게 싫어한다는 것이다.
특히 저건 내 모습이 아니라고 강렬하게 부인하고 싶은 그 모습이야말로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자신의 모습이기에 그렇게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 모습이 아니라면, 정말 남의 모습이라면 그렇게 펄쩍 뛸 듯이 놀라지 않는다.
정말 자기 모습이 아니라면 싫어할 이유가 없다.
자기가 아니고 남이라면, 자기 속에 그런 모습이 없다면 싫어할 이유가 없다.
상대방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사실은 자신이 그 상황에 있어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 의심을 하는 것이다.
자기가 진정 그렇지 않다면 그럴 생각이 없다면 의심할 수 없다.
자기치유의 단서
여기서 하나 정리해둘 것이 있다. 내가 너를 볼 때, 결코 너를 보지 못한다.
너를 보지 않는다. 또 너를 볼 수가 없다.
나를 떠나서, 내 주관을 넘어서 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너를 이해한다고 하지만 실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를 한다.
보통의 우리들로서는 내 식으로 너를 보고 내 속의 너를 볼 뿐이다.
내 그늘을 통해서, 내 상처를 통해서 볼 뿐이다.
그래서 내 모습을 알려면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자의 모습을 보면 된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
우리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들, 그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
그냥 싫다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짓이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이웃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상대에게도 상처를 주는 일이고
그러는 사이에 자신의 상처도 깊어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유 없이 까닭 없이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 자체가 죄업(罪業)이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알자면 알 수 있다.
알고 보면 이유 같지 않은 이유, 하찮은 이유일 터이지만,
갖가지 치사하고 졸렬한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인간됨됨이의 확인일 터이지만,
그것을 직시할 수 있는 자기 정직성이 있다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남녀 간에 헤어질 때도 그렇다. 흔히 성격 차이로 헤어진다고 한다.
이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그 사유가 하나같지는 않겠지만 서로가 헤어질 구실을 그렇게 찾은 것이고
어쩌면 성격이 너무나 똑같기 때문에 그래서 부딪치고 헤어지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여기서도 그렇다.
헤어지는 이유 즉 부딪치고 충돌하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성격 차이라는 애매한 이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너무 치사해서 차마 드러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인정하기 싫은 그렇게 치사한 이유가 진짜 이유일 것이다.
헤어지더라도 이유는 알아야 한다.
싫어하면서도 싫어하는 이유를 모르고 헤어지면서도 헤어지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윤회하는 것 아닐까?
똑같은 숙제를 거듭 되풀이하고 재수 삼수 사수를 거듭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 윤회의 의미가 아닐까?
문제는 정직성이다. 대개의 경우는 ‘내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으려 한다.
또는 ‘내가 저 인간만큼 저렇지는 않다’고 도망가려 한다.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 과대포장을 스스로 허물 수 있는 용기가 없다.
그 점이 문제일 뿐,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이유를 알자면 모를 리 없다.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다면 그리고 직시할 수 있다면,
하찮고 어처구니없는 것들을 끌어안고 뒹굴었던 자신에 대한 통절한 반성력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 하찮은 것을 놓고 줄 당기기를 했던 상대를 보는 눈은 연민에 차 있을 것이다.
미움과 증오의 긴장관계가 거기서 끝나게 될 것이고
그 지점에서 상대와의 화해가 가능하고 그리고 관계의 복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와 너는, 그 하찮고 치사하고 졸렬한 그 이유 자체로부터 떠나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편견과 선입관이 바로잡아지는 그리고 자신의 그늘과 상처를 치유하는 자기 치유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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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닿지 않은 중생은 구제할 수 없다’
‘인연 닿지 않은 중생은 구제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얼핏 들으면 교화를 방치할 수도 있다는 소극적인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또 인연이 없으면 어쩔 수 없다는 체념적인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면 이 말의 진의가 무엇일까? 아무리 교화가 중요하지만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거지 교화를 하거나 상대를 세뇌하거나 의식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 자의 자발성, 자율성을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엄격한 절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을 보면, 교화를 앞세우고 전도를 한다는 사람들에서 그런 절제를 볼 수 없다.
입으로는 말씀을 앞세우지만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내편으로 끌어들이고 말겠다는 자기욕심이 앞서는 경우가 다반사다.
말씀을 전하는 척 하면서 ‘내 말’에 순종해 주기를 바란다.
또 믿음을 말하지만 자기 식의 믿음, 자기 방식의 믿음을 상대에게 강요한다.
절대자야 절대적이지만 절대자를 향한 자신의 믿음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럼에도 자신의 믿음을 절대화하고 상대 방에게 자기 방식의 믿음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오만과 독선이다.
그런 오만과 독선은 말씀을 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없는 것들이다.
차라리 말씀을 훼손시키는 것들이다.
말씀에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한다.
거기에 교화가 성립할 여지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어거지 교화를 하면서도 자신은 교화를 하고 있다는 기묘한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교화(敎化)는 감화(感化)되는 것이다.
감화란 것은, 사람의 향기로 소리 없이 전달되고 그에 자발적 감동이 일어나면서 상응하는 것이다.
감응(感應)하는 것이다.
그러니 교화란 것은 결코 강제될 수 없다.
감동이 강제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식으로 압도한다고 교화될 것도 아니고 장광설을 늘어놓는다고 교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자발적 감응력이 전제되어야지 감응력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부모형제라도 소통할 수 없다.
‘인연 닿지 않은 중생은 구제할 수 없다’는 말,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모든 존재들은 궁극에 이르는 저마다의 각성(=영성)을 갖고 있고 그런 성향을 갖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욕심’을 얹어서 어거지 교화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거지 교화로 인한 분란과 분쟁을 만들지 말고 그럴 바에는 그냥 두라는 것이다.
대중들의 각성을 믿고 그냥 두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 사회에 건전한 이성과 건전한 주체를 세우는 데는 더욱 더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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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일 전이다. 어느 학생이 찾아와서 학과장 추천서를 쓰달라고 한다.
그래서 서류를 보자고 했더니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자기 소개서, 경력사항등을 기록하도록 되어있지만 그 학생은 아무것도 작성하지 않았다,
학생은 그렇게 말했다, "도장만 찍어주시면 제가 쓰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교단생활 30년에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참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이렇게 세태가 변했나, 그런 생각을 한다,
* 굳이 그 학생을 나무라고 싶지 않다, 아마 요즘 세대들이 다 그렇지 않을까 한다.
2.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 학생이 학과장이란 사람을 찾아온 것은
'도장만 받으면 되는 것이니까, 도장만 필요하니까, 그러니까 너는 도장만 찍어다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갓도 당당히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것이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필요에 따라,, 자기 필요한 것만 얻으면 그만이라는 그런 생리다.
사람을 보아도 자기 필요의 충족으로 충족대상으로 만난다는 이야기다.
글쎄.............. 세상이 그렇게 살아질 수 있는 것일까?
내 필요에 따라 살 수 있는 것일까?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필요에 따라 볼 것이다.
가령 입사시험을 친다고 하자,
학생들은 자기 필요에 따라 그 회사에 들어가고자 하지만 그 회사는 회사에 필요한 사람을 쓰고자 한다.
이점 잘 생각해야 한다.
학생들의 필요, 회사의 필요, 그 접점이 있어야 그 사람은 취업에 성공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내 필요, 내 욕심대로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상대의 필요를 정확히 알아야 하고 그에 맞출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점이 참 우려스럽다..
자기 필요만을 주장하고 자기 필요에 따라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렇게 해서 어떻게 세상이 받아들여줄까...?
나만 욕심이 있는 것 아니다. 상대도 욕심이 있다,
내가 만나자는 내 욕심대로 상대가 만나지 않는다.
상대도 상대의 욕심대로 만나자 할 것이다.
먄약 접점이 없다면 결코 만날 수 없다. 그점 잘 생각하라,
내 필요를 앞세우기 보다 상대의 필요를 정확히 파악하고 수용하는 것..
그것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실패하면 길은 없다.
이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지.. 늘 걱정하고 있다,
정말 실력은.. 인생경영의 실력은 여기서 결판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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