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사업가며 이땅의 참 기업인)
'내가 모은 재산은
모두 여러사람을 위하는 일에 쓰여야 합니다...'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사업가며 이땅의 참 기업인...
유일한 박사는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나 9살 어린 몸으로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그곳에서 기업을 일으켜 성공하였습니다.
유 박사는 당시 일본의 압제하에 가난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동포를 위해 1926년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창립하였습니다. 1936년에는 부천시 심곡동 일대에 국내최초의 근대적 제약공장을 준공하여 제약입국의 의지를 실천하였습니다.
또한 박사는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맹호군 창설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국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습니다. 광복 후에는 교육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나라의 근대화에 필수적인 기술 인력의 양성을 위해 사재를 헌납하여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 우수한 인재를 배출시키고 오늘의 유한대학으로 확대 발전시킬 수 있는 초석을 놓았습니다.
박사는 1971년 76세를 일기로 영면하면서 그의 재산 전부를 공익법인에 기증하는 등 평생을 '기업이윤의 사회환원' 정신을 몸소 실천한 참 기업인이었습니다.
유일한 박사의 정신...
유일한 박사는 금세기를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신상(紳商)으로 존경받았고, 지금도 추앙받고 있는 애국적 민족기업인이었습니다. 유 박사는 어린 몸으로 혼자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대학까지 나왔고, 그곳에서 기업을 일으켜 성공적으로 이를 이끌어왔으며, 선배들을 도와 독립운동에도 가담한 굳은 의지의 청년이었습니다.
유 박사는 31세 되던 해 고국에 돌아와 유한양행을 창립하고 일본인들이 득세하고 있던 제약업계에서 그들과 대항하면서 성공을 거두었고, 후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젊은 후진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는 근면ㆍ성실, 그리고 민족을 사랑하는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평생을 일에만 몰두했고, 서거시에는 그의 기업ㆍ사재까지도 사회에 환원하고 간 현대 자본주의의 참정신을 몸소 실천한 문자 그대로 신상이었습니다.
유 박사의 기업이념은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ㆍ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ㆍ배출하며, 기업이익은 첫째는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둘째는 정직하게 납세하며, 셋째는 그리고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한다.' 는 것입니다.
1930년대 조회 때마다 전 사원에게 강조된 유한양행의 기업정신이며, 실질적으로 '유한의 정신과 신조'의 모체가 된 '유한양행의 정신'을 보면
1. 항상 국민보건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2. 우리 민족이 일본 민족보다 못하지 않다.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
3. 유한은 결코 개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며, 이 길을 통해 경제수준을 높여야 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유한의 정신과 신조'의 기반이 된 사상이고, 유 박사 기업이념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 박사의 국가관을 살펴볼 수 있는 그의 어록을 보면
"나라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것을 신성한 말로 서약하여야 한다."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라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라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것을 신성한 말로 서약하여야 한다." 는 말은 그가 191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한인자유대회에서 공개적으로 제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라는 부분은 그가 제약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그의 사업이념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납세에 관한 그의 사고는 "국가는 세수입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하고, 기업은 세금으로 유지되는 국가의 법적 보호 없이 존립할 수 없다. 따라서 기업은 납세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의 평소의 말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즉 국가가 세금에 의해 운영되기 때문에 이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만 국가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고, 이로 말미암아 효과적으로 국가의 법적 보호를 받아야만 기업이 융성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납세관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납세관은 애국심으로부터 나온 국가관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유한양행은 '한국 제일의 자진 납세 업체, 한국 제일의 장부 공개 업체' 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기업들의 엄청난 탈세가 밝혀져 한창 사회가 시끄러웠던 1967년에 유한양행에 대한 세무사찰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기업들과는 달리 유한양행은 미세한 오차조차도 없이 성실히 납세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 1968년에는 모범 납세 우량기업으로 대통령으로부터 동탑 산업훈장을 받은 최초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유 박사의 사회관을 그의 어록을 통해 살펴보면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
"기업은 사회의 이익증진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구이다."
"양질 × 염가의 제품 생산, 이것은 기업성취의 ABC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업의 사회에 대한 책임인 것이다."
위의 유 박사의 말들에서 그가 생각했던 기업과 사회의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기업의 소유주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이며 개인은 그것을 단지 관리하는 관리자에 불과하다는 그의 생각은, 그의 사회관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단면일 것입니다.
사유재산제도 아래 유 박사는, 일제시대에 이미 개인 소유 회사에서 주식회사로 개편함으로써 기업은 사회의 것이라는 자신의 이념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1936년 유한양행은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였는데, 주식의 일부를 직원들에게 공로주로 당시 액면가의 10% 정도 가격으로 분배하였습니다.
유 박사는 1962년에 경성방직주식회사에 이어 두 번째이자,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 공개를 단행하였습니다. 상장한 목적에 대하여 유 박사는 "우리나라 기업이 한 두 사람의 손에 이루어져 가지고는 발전할 수 없다. 여러 사람이 참여함으로 해서 회사가 다소 귀찮을지는 모르지만 회사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한양행을 사회기업으로 만들려는 유 박사의 기업이념이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유 박사가 펼친 교육사업으로 사회에 배출된 인재의 수는 실로 엄청납니다. 가장 대표적인 교육 × 육영사업은 '유한재단'의 설립과 이를 통한 직접 교육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연세대학교와 보건장학회에 대한 장학금 기증과 여러 방법을 통한 교육지원의 기회를 마련하였습니다.
유 박사의 기업관을 한마디로 한다면, 그의 어록에서 볼 수 있듯이 기업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조직이 아니라 그 구성원의 <공동운명체>라는 것입니다. 즉 "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기업활동을 통한 하나의 공동운명체이다."라는 상호유기적 결합체로서의 기업관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가지면 성실, 건강한 이윤관, 기업은 사회의 소유라는 의식, 경영자와 종업원에 대한 각별한 의식들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유재산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나라, 특히 한국에서 기업은 거의 소유주 개인이 소유권을 행사하고 이를 자기 후손에게 상속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 박사는 그의 사후에 공개된 유언장에서 그러한 관행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1971년 3월11일 서거한 이후 다음 달인 4월8일에 공개된 유언장에는, 자신의 손녀를 위한 학자금으로 자기 주식의 배당금 가운데 당시 환율로 3백만원에 해당하는 1만달러를 마련하고, 딸에게는 유한중 × 공고 내의 묘소 및 주면 대지 5천평을 상속하되 '유한동산'으로 만들어 자라나는 세대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게 해 줄 것과, 자신의 소유 주식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신탁기금'에 기증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유 박사는 이미 생전에 유한양행 총 주식의 40%를 각종 공익재단에 기증하였고, 남은 개인 소유 주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기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이윤의 추구는 기업성장을 위한 필수선행조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유 박사는 "기업과 개인적 정실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업을 키우는 지름길이요 또한 기업을 보존하는 길이기도 하다."고 말한 것을, 전문경영인제도를 도입함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지금까지 관행으로 되어 왔던 2세의 대한 경영권의 상속을 과감히 고치고 회사에서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 했던 전문경영인에게 주주총회에서 경영원을 이양하였던 것입니다.
위와 같이 유일한 박사가 <신상, 청지기> 등의 별명을 갖고 있듯이 정직 × 성실 × 신용 × 근면 × 합리적 기업경영에 의해 경제발전에 기여한 전형적인 기업가의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으며, 또한 민족과 국가에 최대의 봉사 정신과 참기업가 정신을 남기고 간 위대한 자수성가형 기업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나라사랑의 참 기업인 유일한(柳一韓) 박사|작성자 사월
약력 과 상훈
1895년 1월1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
1904년 대한제국의 순회 공사인 박장연을 따라 도미
1919년 미국 미시간대학교 상과 졸업
1922년 라초이 식품회사 설립
1925년 중국계 소아과 의사 호미리(胡美利) 여사와 결혼
1926년 12월10일 귀국하여 유한양행 창설
1936년 법인체 주식회사로 변경
1941년 미국 남가주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 취득
1942년 미국에서 항일 무장 독립군 맹호군 창설 주역으로 활동
1945년 미국OSS지하 항일계획인 냅코작전 특수 공작원으로 활동
1946년 귀국하여 초대 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
1948년 미국 스탠퍼드대학원에서 국제법 수학(박사과정)
1962년 유한양행 주식 상장
1963년 대통령으로부터 국가공익포장 수여
1964년 국무총리로부터 우량상공인 표창
1964년 학교법인 유한학원 설립
1965년 연세대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 취득
1968년 모범납세자로 선정되어 동탑산업훈장 수훈
1970년 재단법인 유한재단 설립
1970년 사회공익에 기여한 공으로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1971년 3월11일 향년 76세로 영면
1971년 4월8일 유언장 공개, 전재산 사회환원
1971년 국가복지향상에 이바지한 공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1991년 기업 경영인의 귀감이 되어 중앙대학교로부터 참경영인상 추서
1995년 자유독립과 국가발전에 기여하여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996년 정부로부터 6월의 문화인물 및 독립운동가로 선정
1998년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매일경제신문 등에서 '한국을 빛낸 역대 인물'로 선정
[출처] 나라사랑의 참 기업인 유일한(柳一韓) 박사|작성자 사월